영화 가버나움 리뷰: 비참한 이들에게 위로를

본 글은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 (가버나움) 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 (중략) …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마태오 복음 中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화려한 도시다. 영화 가버나움은 이 도시 속 빈민촌에서 비극적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열두살 주인공 자인에게 삶은 매일의 투쟁이다. 자인은 집안의 생계를 위해 매일 아침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거리에 나가 일한다. 엄마를 도와 약국에서 불법으로 처방받은 약을 옷에 적셔 교도소에 판다. 먹을 것이 없는 날은 설탕물 얼음으로 배를 채운다.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인은 정의롭고 책임감이 강한 아이다. 초경을 하는 여동생을 보고 몰래 자신의 옷을 벗어 여동생에게 생리대를 만들어준다. 자인은 덤덤한 표정과 행동으로 묵묵히 자신의 가족들을 챙긴다.

동생들과 거리에 나와 장사를 준비하는 주인공 자인. <출처: Daum 영화>

 

이런 자인에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온다. 어느날 자인의 여동생 자히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잣집에 팔려가듯 시집을 가게 된다. 자인은 자히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부모와 싸우지만 끝내 여동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책임감이 결여된 부모와 사회구조의 문제를 함께 지적한다. 영화는 부모의 매정한 모습과 딸을 보내고 난뒤 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통해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다. 집세와 닭 몇 마리에 조혼으로 딸을 팔아넘기고는 “딸이 사람답게 살게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변명이 마냥 우습지만은 않다.

이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주인공 자인은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며 방황한다. 자인은 자히르를 떠나보낸 충격으로 집을 나와 정처없이 떠돌다 한 놀이공원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어떤 놀이기구 위 여성 조각상의 가슴을 풀어헤친다. 이 장면은 이후 놀이동산에서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장면과 어우러져 자인이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자인은 또래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타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자인에게 이 놀이동산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이자 자신의 결핍을 적나라하게 비춰주는 현실의 공간이다.

놀이기구 위 조각상의 가슴을 풀어헤친 자인.
놀이동산에서 즐겁게 놀고있는 또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인.

 

이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인 놀이동산에서 자인은 청소부 라힐을 만나게 된다. 라힐은 에티오피아 출신 불법체류자로서 위조한 신분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렵게 살고 있다. 갈곳이 없는 자인은 라힐의 집에 머물며 그녀가 일하는동안 그녀의 젖먹이 아들 요나스를 돌보게 된다.

자신의 친동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인은 매우 정성스레 요나스를 돌본다. 아마 이것은 여동생 자히르를 지키지 못한 상처때문인지 모른다. 우유를 먹이고, 자장가를 불러주고, 냄비를 악기삼아 음악을 연주한다. 요나스도 그런 자인을 잘 따른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들의 유대감이 스리슬쩍 관객들에게 더하여진다.

자인과 요나스. 마치 친형제같다. <출처: Daum 영화>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 유대감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느날 요나스의 엄마 라힐이 불법체류자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데, 돈이 없는 자인은 요나스와 함께 장사를 시작한다. 처방전을 위조해 타낸 진통제를 바닷물과 섞어 만든 음료를 판매하고, 먹을 것이 없으면 요나스와 얼린 설탕물로 허기를 채운다. 장사하는 곳에 자꾸만 따라오는 요나스의 발목에 밧줄을 묶기도 한다. 결국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자인은 입양 브로커 아스프로에게 요나스를 넘긴다. 아스프로가 요나스만 넘기면 자인과 요나스 모두를 살기좋은 스웨덴으로 보내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영화 초반에 자인의 부모가 자인과 그 동생들에게 하던 행동들과 매우 유사하다.

돈을 벌러 나가는 자인과 요나스 <출처: Daum 영화>
자인은 부모가 그의 동생에게 했듯이 요나스 발에 밧줄을 묶는다.

 

유사한 행동을 했음에도, 관객이 영화 초반 자인의 부모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자인을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바라보기는 어렵다. 자인은 영화 내내 정의로웠으며, 요나스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위만을 놓고 보았을 때, 자인이 그의 부모와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논증이다. 이제 관객은 정의롭고 사랑스러운 자인과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그의 부모를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영화는 자인의 굴복을 통해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는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문제들이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스웨덴으로 가기위해 출생신고서가 필요한 자인은,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서류를 요구한다. 그러나 자신의 출생신고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팔아넘기듯 시집간 자히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분노한 자인은 자히르의 남편을 칼로 찔러 소년원에 수감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낳은 부모를 고소한다.

사는게 개똥같아요. 제 신발보다 더러워요. 지옥같은 삶이에요. (중략)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자인이 교도소에서 TV 방송에 전화를 걸어 부모를 고소한 것으로 미루어 보자면, 자인은 단순히 부모를 고소하는 것을 넘어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이 문제를 사회에 알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극복해보려 투쟁했던 열두살 남짓의 소년은, 마지막으로 TV 방송에 자신의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는 발언과 함께 사회의 도움을 요청한다.

가버나움
열두살 소년에게 삶은 너무나 버겁다. <출처: Daum 영화>

 

가버나움은 성경 속 예수가 많은 환자들을 고치고 위로한 도시이다.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나병환자, 혈루증을 앓는 여인, 중풍환자를 고치고 죽은 이를 살려낸다. 고침받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병들고 힘든 이들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가버나움은 예수가 병들고 신음하는 이들에게 찾아가 위로를 전한 도시이다. 지금은 예수가 직접적으로 우리와 함께 있지는 않지만 사람이 예수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을까.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활짝 웃는 주인공 자인은 실제 난민이다. 이 사실은 영화가 픽션임에도 우리에게 현실적인 울림을 준다. 자인은 영화로 인해 유명세를 얻은 후 노르웨이로 이주하였다. 자인의 나아진 삶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겠지만, 이 영화가 주는 깊은 울림과 메세지가 몇 사람의 행복만으로 그치기에는 너무나 크다.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이 빈곤과 아동학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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