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아있는 나날’ 리뷰

해당 글은 매우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다. 매우 성실하다. 모든 것을 바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다.

 

이 사람은 훌륭한 국민인가?

 

위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아마 ‘그렇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성실한 이 인물을 훌륭하지 못하다고 폄하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일본계 영국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1989년 소설 ‘남아있는 나날’을 통해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남아있는 나날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소설 ‘남아있는 나날’ 의 민음사 표지. <출처: Yes24>

패러데이 가문의 집사인 주인공 스티븐스는 주인 어르신의 배려로 6일간 휴가를 떠나게 된다. 어떻게 휴가를 보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스티븐스는 여기저기를 다니며 자신만의 추억에 빠져든다. 스티븐스는 직업의식이 아주 투철한 집사로서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고 유능하고 성실한지, 그리고 집사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스스로에게 고백하며 행복하고 여유로운 휴가를 보낸다. 소설은 아주 유쾌하고 밝은 문체를 통해 스티븐스의 자부심을 대변한다.

소설은 스티븐스의 입을 빌려 한 가지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짐으로써 주제로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품위’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위 질문에 대한 스티븐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평생을 다해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는 또한 훌륭한 집사였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배운 가치관이다. 개인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위대함 중 하나가 ‘직업적 성취’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직업에서 더 많은 성취를 이루고 더 많은 부를 획득하고자 노력하며 살아간다. 더 많은 성취를 이뤄낸 사람들이 박수를 받고 더 큰 부와 존경을 획득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최고선이다.

그러나 소설 ‘남아있는 나날’은 주인공 스티븐스를 조롱과 비판의 대상으로 만듬으로써 이 소설의 주제의식 ㅡ 품위란 무엇인가 ㅡ 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마치 작가 스스로가 스티븐스를 비웃듯이, 해리 스미스라는 한 인물을 통해 스티븐스의 ‘품위론’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품위란 이 나라의 남녀 누구나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히틀러와 맞서 싸운 이유도 결국에는 그겁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껏 표현하고 투표로 의원 나리들을 의사당에 앉혔다 빼냈다 할 수 있으니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 그게 바로 진정한 품위입니다.

 

스티븐스는 이 조롱과 비판에 끝까지 저항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지식과 학식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중대한 국사를 논의하는 데 기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한다.

하루는 주인의 손님이 스티븐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미국과 관련된 부채 상황이 무역 침체의 중요한 요소인가?’, ‘금 본위제를 포기하는 것이 좋은가?’, ‘러시아와 프랑스가 군사 협정을 체결한다면 유럽의 통화 문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이 질문에 스티븐스는 “도울 능력이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한다. 손님들은 그런 스티븐스를 크게 비웃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주인에 대해 자기 나름의 ‘확고한 소신’을 끊임없이 애쓰는 집사의 경우, 훌륭한 전문가의 필수 조건에 속하는 자질, 다시 말해 ‘충성심’ 면에서 부족해질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다시말해, 스티븐스는 집사로서 최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소신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있어 비굴하거나 부끄러움은 한 점 존재하지 않는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며 끝까지 자신의 견해를 고집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작가는 저항하는 스티븐스를 벼랑 끝 절벽으로 밀어버린다. 이를 통해 스티븐스의 품위론을 강력히 비판하고 소설의 주제의식을 더욱 강력히 부각시킨다. 어느날 스티븐스가 모시는 주인님이 나치 독일의 영국 스파이였음이 밝혀진다. 집사인 스티븐스는 몇 번의 비밀 회동을 옆에서 지켜보았음에도 ‘집사는 집안일에 절대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직업적 신념에 의해 이를 무관심으로 일관해왔음이 밝혀진다. 다시 한 번 소설은 집안의 도련님인 카디널 씨의 입을 빌려 스티븐스를 맹렬히 비난한다.

 

스티븐스, 당신이 관심을 안 갖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거요.

잘 모른다고? 이봐요, 스티븐스, 관심도 없소? 궁금하지도 않소?

 

그렇다면 과연 한 소설이 자신의 주인공을 조롱거리와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까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에서 태어나 5살에 영국으로 이민하여 영국인이 되었다. 편견인지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작가의 모국 일본을 향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아주 강하게 받는다. 일본인들은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아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널리 알려져있다. 자신도 모르게 나치 독일에 협조한 스티븐스와,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제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 되어버린 일본국민들이 오버랩되어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일본에 대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하나는 국민들이 너무 친절하고 순한 나라, 그리고 또 하나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나라이다. 이 믿을 수 없이 모순되는 두 수식어는 과연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소설 ‘남아있는 나날’은 아주 납득할만한 대답을 내놓는다. 바로 일본 국민들이 스티븐스와 같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경제력은 강력하다. 이들은 ‘장인정신’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가업을 이어 경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치에는 무관심하다. The Economist의 2017년 민주주의 지수에서 일본의 정치참여 지수는 6.11점으로 비슷한 랭킹의 주변 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다.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The Economist’ 에서 발표한 2017 민주주의 지수. 비슷한 랭킹의 주변 국가들에 비해 정부의 기능성 (Functioning of government) 지수가 매우 높음에 비해 정치참여 지수 (Political participation) 매우 낮음을 볼 수 있다. <출처: Wikipedia>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선진국’이라고 칭한다. 이 때 항상 나오는 근거 중 하나는 강력한 경제력이다. 일본은 국민들의 근면성실함을 바탕으로 경제부흥을 이룩해냈다. 그러나 과연 정말 선진국이란 어떤 국가인지 되물어야 할 것이다.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직업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권한을 벗어났기 때문에”, “관심이 없어” 회피하는 국민들이 선진국 국민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소설 중 한 영국인 해리 스미스의 대사로 본 포스트를 마무리한다.

 

“사람이 노예가 되어서는 품위를 갖출 수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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