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아 있는 나날』 리뷰: 국민의 품위란 무엇인가
해당 글은 매우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K씨는 모범적인 인물입니다.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생활하고 이웃에게도 친절을 베풀면서 주변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쏟아 붓고, 상사로부터 인정받는 유능한 직업인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K씨는 모범적인 국민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자주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K씨와 같은 사람은 분명 모범적인 국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이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소설은 K씨와 같은 사람이 실제로는 ‘아주 나쁜 국민’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 리뷰를 통해 우리는 가즈오 이시구로가 생각하는 ‘좋은 국민’의 정의를 탐구해 보겠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1989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스티븐스라는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저택에서 수년 동안 집사로 일해온 남자의 회고록 형식으로 풀어져 있습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헌신과 민주주의, 사랑, 기억에 대한 회고를 통해 미련과 후회,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공유합니다. 이시구로의 미묘한 필체와 세밀한 인간 심리 묘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패러데이 가문의 충실한 집사인 스티븐스는 주인의 관대함 덕분에 6일간의 휴가를 떠나게 됩니다. 스티븐스는 평소에 일에만 몰두하는 인물로,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함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행을 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에 잠기며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은 스티븐스의 내면적 독백을 따라가며 그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 그리고 집사로서의 능력과 일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소설은 유쾌하고 밝은 문체로 시작되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성실하고 긍정적인 인상을 받게 합니다.
작품 중 스티븐스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소설 전체에 걸쳐 매우 중요한 주제이자, 독자들에게 던지는 작가의 질문입니다.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품위’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위 질문에 대한 스티븐스의 대답은 ‘평생을 다해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 입니다. 이는 훌륭한 집사였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배운 가치관입니다. 사실 개인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위대함 중 하나가 ‘직업적 성취’임에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직업에서 더 많은 성취를 이루고 더 많은 부를 획득하고자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성취를 이뤄낸 사람들이 박수를 받고 더 큰 부와 존경을 획득합니다. ‘직업적 성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최고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직업적 성취’만을 달성한 사람을 ‘품위있는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작가는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참으로 파격적인 방법으로 전달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주인공을 철저하게 무너트리고 조롱과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작가는 소설 속 해리 스미스라는 캐릭터를 통해 스티븐스의 ‘품위론’을 아주 적나라하게 비판합니다.
품위란 이 나라의 남녀 누구나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히틀러와 맞서 싸운 이유도 결국에는 그겁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껏 표현하고 투표로 의원 나리들을 의사당에 앉혔다 빼냈다 할 수 있으니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 그게 바로 진정한 품위입니다.
스티븐스는 해리 스미스의 비판에 끝까지 항변합니다. 스티븐스와 해리 스미스를 통해 비판의 대상과 작가가 마치 대화를 주고 받는 듯한 구도를 연출합니다. 스티븐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지식과 학식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중대한 국사를 논의하는 데 기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스티븐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국가 운영은 지식과 학식이 풍부한 소수에게 맡겨야 한다” 는 것입니다.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민주주의 사상과 어긋나는 생각입니다. 과두제에 가까운 사상입니다.
하루는 주인의 손님이 스티븐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미국과 관련된 부채 상황이 무역 침체의 중요한 요소인가?”, “금 본위제를 포기하는 것이 좋은가?”, “러시아와 프랑스가 군사 협정을 체결한다면 유럽의 통화 문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이 질문에 스티븐스는 “도울 능력이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합니다. 아주 정석이지만 형식적인 답변입니다. 손님들은 그런 스티븐스를 크게 비웃지만스티븐스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념에 확신이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주인에 대해 자기 나름의 ‘확고한 소신’을 끊임없이 애쓰는 집사의 경우, 훌륭한 전문가의 필수 조건에 속하는 자질, 다시 말해 ‘충성심’ 면에서 부족해질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다시말해, 스티븐스는 한 직업인, 그러니까 집사로서의 역할을 아주 충실히 수행합니다. 집사는 주인에 대해 특별한 견해를 가져서는 안되며, 중요한 자질인 ‘충성심’을 위해 개인적 의견을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도 마냥 틀리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정말 멋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소설의 구도가 참으로 재밌습니다. 창작물 속의 캐릭터인 스티븐스는 자신의 창조주인 작가에게 끝까지 저항합니다. 주인공은 신념과 논리로 무장해 작가에게 끝까지 대항합니다. 하지만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작가는 저항하는 스티븐스를 완전히 산산조각내며 소설의 클라이막스를 폭죽과 같이 장식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나락으로 몰고감으로써 소설의 진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가장 충격적인 반전이 드러납니다. 바로 스티븐스의 주인이 나치 독일을 위해 일하는 영국 스파이임이 밝혀집니다.
집사인 스티븐스는 비밀 회동을 수차례 목격했음에도 이를 묵인했습니다. ‘집사는 집안일에 절대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직업적 신념만을 고집한 나머지, 명백한 전쟁범죄를 눈감아 버렸습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스티븐스의 ‘품위론’을 박살냅니다. 작가는 이제 카디널 씨의 입을 빌려 스티븐스를 맹렬히 비난합니다.
스티븐스, 당신이 관심을 안 갖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거요.
잘 모른다고? 이봐요, 스티븐스, 관심도 없소? 궁금하지도 않소?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에서 태어나 5살에 영국으로 이민하여 영국인이 되었습니다. 일본과 영국은 국민의 정치 참여도 면에서 참으로 대조되는 나라입니다. 일본 국민들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장인정신입니다. 일본 국민은 아주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대를 이어 한 분야에 대가가 된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스티븐스는 집사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나치 독일에 협조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일본 국민들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전쟁범죄에 일조하게 되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이 둘이 너무나 겹쳐 보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공통점이 떠올랐습니다.
일본은 두 개의 상반된 수식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국민들이 너무 친절하고 착한 나라입니다. 둘째는 2차 세계대전 전범 국가입니다. 이 양극단의 상반된 수식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왜 이렇게 선하고 성실한 국민들이 사는 국가가 전범국가가 된 것일까요?
저는 소설 『남아 있는 나날』 에서 바로 그 해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바로 일본 국민들이 스티븐스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The Economist의 2017년 민주주의 지수에서 일본의 정치참여 지수는 6.2점입니다. 다른 민주주의 국가(호주: 7.78, 대한민국: 7.22, 노르웨이: 10, 영국: 8.33) 들에 비하면 유독 정치참여 지수가 크게 낮습니다.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 하다는 것이 지표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선진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때 항상 나오는 근거 중 하나는 강력한 경제력입니다. 일본은 국민들의 근면성실함을 바탕으로 강력한 경제력을 보유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정말 선진국 국민은 어떤 국민일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정치참여는 국민의 의무입니다.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직업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권한을 벗어났기 때문에”, “관심이 없어” 회피하는 국민들이 선진국 국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남아 있는 나날』 은 성실하고 신념가득한 한 주인공의 몰락을 통해 민주주의, 국민의 의무, 품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소설 속 해리 스미스의 대사를 인용하며 본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사람이 노예가 되어서는 품위를 갖출 수 없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