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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루먼 쇼 리뷰: 거짓과 통제가 빼앗는 것

본 리뷰는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There is no different between private life and public life.

My life, is my life, is the Truman show. It’s a noble life.

제 사생활과 사회생활의 차이는 없습니다. 제 인생은, 그냥 트루먼 쇼에요. 고귀한 삶이죠.

It’s all true, it’s all real. Nothing here is fake. It’s merely controlled.

다 진짜고 리얼이에요. 가짜는 없어요. 단지 조금 통제될 뿐이죠.

-영화의 도입부, 배우들의 인터뷰 중-

영화 트루먼 쇼의 포스터 <출처: Daum 영화>

1998년 개봉된 영화 트루먼 쇼는 가상의 세계 씨헤이븐에 살아가는 한 평범한 남성 트루먼의 이야기를 다룬다. 개봉 20주년이 지난 지금, 본 포스트에서는 트루먼쇼가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메시지를 리뷰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트루먼은 씨헤이븐에서 태어나 자란 보통의 30대 직장인이다. 그러나 트루먼이 살고 있는 도시 씨헤이븐은 사실 TV쇼의 한 세트장이다. 트루먼의 친구, 아내, 부모님 등 트루먼을 제외한 도시의 모든 이들은 고용된 연기자로서, 트루먼이 주연인 다큐멘터리 ‘트루먼 쇼’의 조연일 뿐이다. 어느날 씨헤이븐의 수상함을 눈치챈 트루먼은 첫사랑 실비아를 찾아 탈출을 시도한다. 트루먼 쇼의 제작자 크리스토퍼는 쇼를 지속하기 위해 트루먼의 탈출을 방해하지만, 트루먼은 끝내 씨헤이븐 밖으로의 탈출에 성공하여 자유와 사랑을 찾아나선다.

고전 명작 영화 ‘트루먼 쇼’의 주제는 널리 알려져있다. 안락한, 그러나 거짓인 세상을 떠나 진짜 세상과 자유를 찾아나서는 트루먼의 이야기라고 해석하면 무리가 없다. 거짓된 행복보다 고단하더라도 진실된 삶이 좋다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2000년대에 개봉된 매트릭스와도 비슷한 메시지를 공유한다. 조금 더 파고들어 질문해보자. 왜 우리는 편안한 거짓보다 고된 자유를 택해야 하는가? 씨헤이븐과 매트릭스에서 만족하며 사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영화 ‘트루먼 쇼’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영화에는 하나의 큰 대립이 존재한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쇼 제작자 크리스토프와 자유를 찾아 떠나는 트루먼.

트루먼 쇼의 제작자 크리스토프 <출처: Daum 영화>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쇼의 모든 것(시간, 계절, 날씨, 사건, 인물의 대사 등)을 연출하고 통제한다. 그는 씨헤이븐이 지상의 낙원이라 주장하며 트루먼의 인생을 철저히 씨헤이븐에 속박시킨다. 크리스토퍼는 트루먼에게 바다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어줌으로써 씨헤이븐 밖 세상에 대한 트루먼의 호기심을 철저히 차단한다. 크리스토프는 씨헤이븐과 트루먼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We’ve become bored with watching actors give us phony emotions. We are tired of pyrotechnics and special effects. While the world he inhabits is, in some respects, counterfeit, there’s nothing fake about Truman himself. No scripts, no cue cards. It isn’t always Shakespeare, but it’s genuine. It’s a life.

배우들이 연기하는 가짜 감정은 점점 지루해집니다. 우리는 불꽃놀이와 특수효과에도 지쳐갑니다. 비록 트루먼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약간은 가짜라고 해도, 트루먼에 대해서 만큼은 거짓이 없습니다. 대본도, 큐 카드도 없습니다. 이 쇼가 항상 셰익스피어 만큼은 아니지만, 이것은 진짜입니다. 이것은 인생입니다.

I have given Truman the chance to lead a normal life. The world, the place you live in, is the sick place. Seahaven is the way the world should be.

나는 트루먼에게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당신이 살고있는 이 세상은 병든 곳입니다. 씨헤이븐은 바로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답안입니다.

영화 속 트루먼 쇼의 연출자와 출연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씨헤이븐은 조금 통제되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진짜 인생을 다루는 고귀하고 행복한 세상이다.” 이러한 주장은 현실 속 통제주의자들 혹은 매우 엄격한 부모들의 주장과도 비슷하다. 그들 주장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행복한 삶의 정답을 알고있는 나 자신 혹은 나의 집단이 누군가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씨헤이븐은 트루먼에게 지상낙원인 것일까? 트루먼은 씨헤이븐에서 한 인간으로서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영화 트루먼 쇼는 씨헤이븐의 기만적 모습을 통해 이를 비판한다. 거의 완벽히 통제된 지상낙원 씨헤이븐은 거짓과 기만이 넘치는 곳이다. 씨헤이븐은 트루먼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들을 동의없이 빼앗는다. 평소의 씨헤이븐은 평화로운 곳인데, 트루먼이 탈출을 시도하자 씨헤이븐의 모순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트루먼이 마땅히 누려야 할 모든 인간관계의 기쁨과 슬픔은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고, 트루먼을 사랑해줄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트루먼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그의 아내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배역에 충실할 뿐이다. 왜 아이를 갖고 싶냐는 트루먼의 심각한 질문에도, 그녀는 큐 사인에 따라 코코아 PPL 홍보문구를 대답으로 읊는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는 매우 코믹하게 보인다.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냐는 트루먼의 격정적인 반응에, 그녀는 트루먼에게 칼을 겨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트루먼의 친구 말론이 등장하자, 그녀는 말론에게 안기며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토로한다. 그녀가 진정으로 트루먼을 사랑했다면 하기 어려운 행동들이다.

트루먼의 가장 친한 친구 말론은 크리스토프의 꼭두각시이자 트루먼의 인생을 통제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다. 그가 트루먼을 설득해 씨헤이븐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면이 이를 잘 나타낸다. 말론이 트루먼에게 던지는 진심어린 조언들도 사실은 크리스토프가 전달하는 대사를 그대로 읊는 것에 불과하다. 트루먼과 단 둘이 앉아 옛 추억을 회상하는 순간에서조차 “너에게만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크리스토프의 대사를 트루먼에게 전달한다. 그가 트루먼과 마시기 위해 가져오는 맥주캔은 PPL이다.

트루먼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받아야 할 부모의 애정조차 크리스토프에게 빼앗긴다. 트루먼의 아버지 역 배우는 자신이 매우 일찍 사망하게 된 것에 불만을 품는데, 그 이유가 아들과 헤어지는 것이 슬픈게 아니라 바로 자신이 일찍 쇼에서 하차하기 때문이다. 트루먼이 사라진 씨헤이븐의 주민들은 야간 수색작업을 펼치는데, 트루먼의 어머니 역의 배우는 아들을 걱정하기는 커녕 “이러다 내 목이 쉬겠어!” 라며 역정을 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트루먼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옆집 이웃과 개를 기억하는가? 그들은 트루먼이 실종되자 “트루먼을 찾으면 확 물어버려!”라는 주인과 사나운 사냥개로 돌변한다.

트루먼의 인생에서 부모의 사랑, 이웃의 호의, 친구와의 우정은 모두 시청률을 위한 거짓 연출에 불과하다. 죽은줄 알았던 아버지와 재회한 트루먼의 눈물은, TV 미디어에 의해 트루먼쇼 시청자들의 가십거리로 전락한다. 제작자 크리스토프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트루먼을 보살피는듯이 보이지만, 그의 목표는 오직 트루먼 쇼의 높은 시청률과 성공이다.


이 거짓된 세상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수십년을 살았던 그곳을 벗어나는 것은, 마치 섬을 탈출하는 것과 같다. 트루먼은 거짓 세상 씨헤이븐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자신을 쫓아오는 모든 추격을 뿌리치고 오랜 트라우마인 물과 마주한다. 트라우마, 폭풍우, 그리고 존재의 여부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는 두려움과 함께 요트에 몸을 맡긴다. 통제광 크리스토프는 살인적인 폭풍우를 일으켜 트루먼의 탈출을 방해한다. 힘들게 다다른 세상의 끝에서 만난 것은 높은 벽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지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출구를 찾아낸다.

트루먼이 씨헤이븐을 나가려고 하는 찰나에 크리스토프는 씨헤이븐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역설하며 트루먼을 설득한다. 그러나 트루먼은 크리스토프와 트루먼 쇼의 시청자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낸 후 당당히 씨헤이븐을 걸어나간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본능적으로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우리는 왜 트루먼의 탈출에 공감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일까? 트루먼의 이 고단한 여정은 통제와 억압 속에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분투했던 인간의 역사와 닮아있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것들을 누리기 위해 인류는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나아왔다.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요트에 몸을 맡기고, 폭풍우를 뚫고, 다시 만나는 벽을 지나 씨헤이븐 밖으로의 출구를 찾았다.

트루먼은 씨헤이븐에 남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모든 진실을 마주한 트루먼에게 씨헤이븐에서의 삶은 예측가능하고, 통제가능한 걱정 없는 삶일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하는 두려움은 많은 경우 불확실성에 의한 것인데, 씨헤이븐에서는 불확실한 요소들이 매우 적다. 트루먼은 씨헤이븐에서 아주 편안하고 걱정없는 인생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댓가는 인간성의 상실이다. 그가 누려야 할,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진실함은 모두 사라진다. 트루먼 쇼를 시청하고 있는 시청자들의 사랑도 쇼가 끝나면 채널을 돌리듯 쉽게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다.

트루먼 쇼가 제시한 통제된 세상의 문제점은 인간성과 사랑의 상실이다. 통제는 한 인간으로부터 그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들을 의식없이 빼앗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종류의 통제 속에서 당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빼앗긴 상태에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것에 익숙해져있다면, 트루먼이 그랬듯 씨헤이븐을 탈출해 당신의 권리를 되찾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 과정 속에서 당신의 트라우마, 두려움, 크리스토프와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다다른 곳에서 우리는 진짜 세상을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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