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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 리뷰: 대한민국 청년의 분노는 어디서 오는가

본 포스트는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17년 8월,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층간소음으로 인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같은해 7월에는 인천 계양구의 한 빌라에서 차량 주차문제로 한 20대가 골프채로 차량을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월에는 경남 양산의 한 아파트에서 아파트 외벽 작업을 하던 김모씨의 휴대전화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며 아파트 주민이 밧줄을 끊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위 사건들의 공통점은 순간적인, 혹은 누적된 분노가 폭발적으로 분출되어 가져온 참변이라는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소위 ‘분노형 범죄’는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경찰청의 ‘2015 통계연보’에 따르면 폭력범죄 전체 중 범행 동기가 우발적이거나 현실 불만에 있는 건수가 41.3%를 차지했다고 한다 1. 그리고 2011년 이후로 우발적 범죄의 비율은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2.

위 사건과 통계들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에 비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더 많은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실제로 TV, 뉴스 등에서도 분노와 관련된 기사들을 더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노들은 이념갈등, 낮은 취업률과 경제성장률, 계층 간 소득 갈등 등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된다.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분노의 정도와 종류는 더 심해지고 다양해지는 듯 보인다. 왜 그리고 무엇이 우리 사회에 분노를 유발하는 것일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종수, 혜미, 벤 세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의 이야기를 통해 위 문제를 다룬다.

버닝
<출처: 다음영화>

영화 버닝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번째 해석은 청년 종수가 자신이 사랑하던 여성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벤을 추적하여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둘째는 가난한 종수가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혀 분노한 나머지 선량한 시민인 벤을 연쇄살인마로 오인해 살해한 이야기이다. 관객들 모두 각자의 이유를 들어 어느 한 가지 해석을 주장하지만, 사실 영화는 많은 복선과 은유들을 곳곳에 장치하여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하나로 보아도 무리가 없도록 연출된다. 그러나 어느 해석도 80퍼센트는 들어맞다가, 나머지 20퍼센트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만나게 된다. 


특별히 본 포스트에서는 후자의 해석을 통해 이 영화를 리뷰하고자 한다. 전자의 관점에서 본 버닝이 단순히 연출이 참신한 스릴러 영화에 그친다면, 후자의 관점에서 본 버닝은 분노의 문제에 관하여 아주 독특한 기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가 된다. 이 영화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분노의 요인들을 살피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경험해보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영화 버닝에서 분노의 타깃은 미스테리한 청년 벤이다. 벤의 재력과 상대방을 비웃는 듯한 애매모호한 태도는 종수와 관객 모두에게 박탈감과 적개심을 느끼게 한다. 벤은 종수가 여행에서 돌아온 혜미와 반갑게 재회할 그 순간에 아주 뜬금없이 등장하는데, 벤이 식사 후 혜미를 데려다주는 장면에서 종수의 트럭과 벤의 포르쉐는 선명하게 비교된다. 종수는 휴전선 근처의 시골집에 사는데 벤은 서울의 고급 빌라에 살고있다. 소설가 지망생 종수가 소에게 여물을 줘야할 때 벤은 카페에서 소설을 읽는다. 딱히 하는일도 없는 것 같은 백수같은 벤이 어디서 이런 재력을 쌓았는지 미스테리하다. “종수씨”, 하며 종수를 부르는 벤의 말투며 표정도, 태도와 행적들도 왠지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버닝
<출처: 다음영화>

잔잔하고 소소한 긴장감으로 출발한 이 영화는 혜미가 사라진 이후부터 서스펜션과 은유를 통해 범죄스릴러 영화처럼 연출된다. 벤은 종수에게 자신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 취미라 말하고 종수는 이를 막기위해 이른 새벽부터 시골마을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벤의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이다’라는 말은 혜미의 실종과 함께 마치 혜미가 묶여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울듯한 은유를 통해 관객과 종수로 하여금 실제 범죄가 일어날 것같은 암시를 제공한다. 혜미는 벤의 차를 타고 사라진 후 다시 영화에 출연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벤이 혜미를 납치하거나 살해했을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버닝
<출처: 다음영화>

영화는 연출과 은유를 통해 종수와 관객에게 벤이 혜미를 납치 혹은 살해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계속해서 강화한다. 종수가 비닐하우스 찾기를 멈췄을 때, 영화는 카메라의 포커스를 종수에서 어떤 집으로 옮김으로써 마치 혜미가 저곳에 있을 듯한 인상을 준다. 벤이 시골의 한 저수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장면을 보면 마치 벤이 저 어딘가에 혜미를 은닉했을 것 같다. 벤의 빌라의 지하주차장에서 발견한 고양이는 이름을 불렀을 때 반응하는 것으로 보아 혜미의 고양이로 보인다. 왜 혜미의 고양이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벤이 혜미를 살해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데려온 것은 아닐까.

이러한 연출은 뒤로 갈수록 더욱더 극적으로 치닫는다. 벤이 새로만나는 여성에게 화장을 정성스레 해주는 장면은 음악과 연출을 통해 마치 벤이 이 의식을 마친 후 이 여성을 혜미와 같이 살해할 것이라는 암시를 계속해서 전달한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벤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심증을 관객에게 강화시킨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벤이 연쇄살인범일 것이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도록 만든다.

버닝
<출처: 다음영화>

영화가 진행될 수록 쌓인 종수와 관객의 분노는 영화의 말미에서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종수가 벤에게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어진 시점에서, 관객 또한 벤이 혜미의 실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큰 확신을 갖게 된다. 결국 종수는 (실제로 혹은 소설속에서) 추운 겨울날 벤을 어느 공터로 불러 끔찍히 살해한다. 이때 관객들은 벤을 동정하기 보다는 영화 내내 쌓인 벤에 대한 분노를 종수와 함께 표출함으로써 어떠한 종류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인간은 분노가 극적으로 표출된 후 이성과 냉정함을 다시 찾는 경향이 있다. 종수의 살인 후, 혹은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은 벤이 정말로 죽어 마땅한 살인범이었는가 다시 되돌아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벤이 연쇄살인마가 아닌 그저 건방진 부잣집 아들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혜미는 납치된 것이 아니라 습관처럼 불현듯 여행을 가버린 것일수도 있고, 실제로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벤의 지하 빌라에서 만난 고양이는 그저 길고양이이거나 다른 사람의 고양이었고 특정 이름에 반응한 것이 아니었을 수 있다.

벤이 과연 비닐하우스를 정말로 태웠을까에 대한 정답도 없다. 그저 종수에게 농담으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 취미라고 한 것일 수 있다. 종수는 실제로 불에 탄 비닐하우스를 발견하지 못했고,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도 그런 것은 없다고 한다. 종수가 벤을 미행한날, 벤은 그저 바람을 쐬러 저수지에 간 것일 수도 있다. 그저 바람둥이인 벤은 만나는 여성에게 특별히 화장을 해주는 것이 취미일 수도 있다. 만났던 여성들의 팔찌 등 악세사리를 그저 모으는 것이 취미일 수 있다. 이렇듯 영화 내에서 제시한 증거들만으로는 사실 벤이 혜미를 죽였다는 사실을 전혀 입증할 수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뒤집어놓고 보면 벤은 그저 평범한 시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관객들은 벤을 나쁜인물, 연쇄살인마로 인식을 한 것일까? 그것은 이 영화가 수많은 영화적 은유 (메타포)들을 통해 ‘귤이 여기 없다는 사실을 잊는’ 경험을 관객에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벤이 범죄자인듯한 연출을 보여주며, 수많은 시도 끝에 결국 관객들은 ‘벤이 범죄자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결국 사실관계는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고 마지막에는 ‘분노의 감정’ 만이 그 자리에 남게된다. 벤이 선량한 시민일 가능성과 증거도 충분하지만, 이미 그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벤에게 이렇게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일까. 그것은 특별히 하는 것도 없는 벤에 대한 박탈감에서 온 것은 아닐까. 가난한 종수는 선으로, 부자 벤은 악으로 보는 선입견을 가진 것은 아니었을까.

버닝
<출처: 다음영화>

이러한 해석을 통해 전달되는 감독의 메시지는 선명하다. 바로 현재 당신들의 분노가 어쩌면 양극화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과 부자들을 죄인인듯 보도하는 미디어 매체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실제로 그것을 경험한 관객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이 영화가 아주 독특하게 관객들을 곤경에 빠트리는 방식이다. 한줄로 표현하면 매우 진부하고 단순한 메시지가, 영화를 통해 감정의 경험으로 다가온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방식처럼 관객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함정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의식에는 동의가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 분노의 감정을 선동하고 과연 그 감정과 결말에 대해 치열히 토론하게 만드는 영화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평범한 장면을 서스펜스로 만들고 실제 범죄장면 하나 없이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감독의 연출력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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